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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서평]경제전쟁시대 이순신을 만나다 by 지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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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전쟁시대 이순신을 만나다 표지 (출처 Yes24)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 티비에 나온 한 코미디언이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라고 이순신 장군의 유언을 패러디하면서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게 만들곤 했다. 나와 친구들은 모두 그 말을 따라하면서 낄낄대며 웃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이순신 동상이 있었다. 어느 초등학교에나 있었을 것이다. 우리 친구들 사이에서 전설이 있었는데 12시만 되면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이 살아나서 들고 있는 칼과 책으로 서로 싸운다고 했다. 

그 당시 나에게 이순신은 그런 상상 속의 인물이었다.

저자인 지용희 교수님은 책에서 '언젠가 저 아이들도 장군을 만날 것이다. 더 자라나서 세상과 만나고, 세상과 투쟁하고, 세상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장군을 다시 만날 것이다. 그때 그들은 오늘을 추억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나는 서른 다섯이 되어서야 장군을 다시 만났다.

 

성웅(聖雄) 이순신

 

그냥 영웅이 아니다. 성인의 반열에 오른 영웅이라 하여 성웅(聖雄) 이순신이다.

내가 생각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그의 인생은 정말 순탄치 않았다..

최전방을 수호하는 장수임에도 불구하고.. 온 나라의 힘을 몰아주어도 모자랄 판국에

나라를 위해 한 몸 받치며 싸우던 그는 조정 대신들에게 온갖 시기질투와 끊임없는 모함을 당했다.

너무나도 열악한 군수 환경과 물자들..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23전 23승 하셨을까?

한없이 이어진 고통과 부담감을 짊어지고 어떻게 버틸 수 있었을까?

그의 삶을 생각하니 이 밤에 한없이 숙연해 진다.

 

인간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하던 당시 원균이 부산 바다에서 일본에게 패해 백 척이 넘는 조선의 배를 잃어버린 후

12척의 배가 남은 상황에서 선조는 다시금 장군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 현재 해군 참모총장의 자리이다.

당시 선조가 보낸 편지에는 왕으로써 대단한 후회와 사죄의 글이 써있었다.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된 후 백의종군을 하던 길을 따라 경상남도와 전라남도를 돌며 민심을 수습하고 흩어진 장수들, 병사들 그리고 군수 물자를 모았다. 당시에 480km나 되는 거리를 한 달여 동안 돌았다고 한다.

전투는 군대가 하지만 전쟁은 백성이 한다는 말이 있다. 백성이 생업을 지키고 지원을 해야 전쟁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급박한 와중에 민심을 수습하고 안정시켰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서 몇번씩이나 가슴이 먹먹해 지곤했다. 이순신 장군의 인생은 어찌도 이리 처절했을까.. 난중일기에 어찌도 이리 많은 눈물을 흘리셨다고 기록하셨을까..

'흐리고 비가 내릴 듯했다. 홀로 배 위에 앉아 있으니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눈물이 났다. 

천지간에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이 있으리오. 아들 회가 내 심정을 알고 매우 괴로워했다.'

전쟁 중에 어머니와 막내 아들을 잃고 명량 해전을 치루기 전 몇일 동안은 밤에 극심한 부담감과 스트레스로 한 밤 중 수차례 구토하고 실신을 반복했다고 한다.

전쟁 영웅 이순신 장군도 한없이 나약한 인간이었다.

 

이순신 리더십

 

이순신 장군은 병사들과도 허물없이 지냈다고 한다.

군대와 관련된 일이면 제일 말단의 졸병이라도 의견을 낼 수 있도록 하고 경청했다고 한다.

장수로서 너무 권위가 없다는 이야기도 들었을 정도라고 한다. 같이 막걸리도 마시고 씨름도 즐기고 활 쏘기 내기도 했다고 한다. 부하들을 사랑했고 너무나도 인간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렇지만 군법을 어길 시에는 가차없었다고 한다. 직접 부하를 참수를 시킨 사례도 종종 나온다.. 신상필벌을 아주 중요시 여겼다. 마키아벨리 군주론에 나오는 엄격한 군주의 면모도 갖춘 듯 하다.

병사들 입장에선 전쟁에서 죽는 거나 탈영해서 장군에게 목이 베여 죽는 거나 매한가지인데 차라리 전쟁에서 명예롭게 죽는 길을 택했을 것이다. 그런 카리스마가 12척의 배로 133 척의 배를 상대로 물러나지 않게 만들었을 것이다.

 

혁신의 거북선

 

임진왜란 발발 1년 2개월 전 전라좌수사로 임명된 장군이 부임해서 가장 먼저 한 것이 무기 개발이었다. 바로 거북선이다.

거북선은 당시로서 아주 혁신적인 무기였다. 일본군의 해전 양상을 잘 분석해서 만들었는데 일본군은 배를 가까이 붙여 상대편의 배에 뛰어 올라 일본도로 백병전을 하는 방식이었다. 백병전을 무력화하기 위하여 판옥선 위에 철갑을 두르고 쇠못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아군의 무기는 포와 화살인데 장거리를 유지해야 했는데 거북선이 돌격선으로 거리 유지에 아주 효과적인 방안이었다.

당시 임진왜란 발발하기 직전 거북선 화포의 시험평가를 마쳤다고 하니까 타이밍도 절묘했다.

나도 방산업체에서 항공기를 만들기 때문에 이순신 장군이 전쟁을 준비하는 심정으로 무기 개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나약한 인간이고 빈틈도 많기 때문에 자주 정신이 빠질 때가 있다.. 더 잘해야겠다 생각하고 항상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이순신 자살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그것도 다 이긴 전투에서 장군은 왜 적진 한가운데서 갑옷을 풀어 헤치고 북을 치며 자신의 위치를 노출시켰을까? 그 결과 일본군의 조총에 왼쪽 가슴을 관통당한 후 북 채를 떨어뜨리고 쓰러지셨다.

그리고 "전투가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하셨다.

전투를 승리한 후 병사들이 환호할 때 장군선은 조용했다. 장군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사람이 통곡을 하였고 명나라 장수 진린은 이순신의 사망 소식에 세번이나 넘어지면서 배로 넘어와서 통곡했다고 한다. 그는 이순신 장군을 진심으로 존경했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이 자살한 것인지 확실치 않으나 전쟁에서 이겼어도 간신들의 술수에 역모죄로 삼대가 멸할 벌에 처할 수도 있었을 것임을 생각하여 자살을 한 것이 아닐까

 

진정한 인간 정신의 승리로 인류에 위대한 유산을 남기신 성웅 이순신을 기리며..

어떤 인간도 겪어보지 못했을 고통과 중압감을 이겨내고 23전 23승 전승으로 조선의 백성을 지켜낸 사랑과 불굴의 정신을 영원히 기억하겠습니다.